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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네덜란드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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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네덜란드 침공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이 네덜란드를 점령한 군사 작전이다.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네덜란드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지만, 독일은 영국을 공격하기 위한 기지로 네덜란드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네덜란드는 군사력과 장비가 부족했고, 특히 기갑 전력이 열세하여 독일의 침공에 취약했다.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워터 라인과 네덜란드 요새를 중심으로 방어 전략을 세웠지만, 전반적인 군사력 부족으로 인해 방어에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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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네덜란드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1940년 독일의 로테르담 폭격 이후 파괴된 로테르담 시가지 모습
1940년 독일의 로테르담 폭격 이후 파괴된 로테르담 시가지 모습
분쟁네덜란드 전투
전체프랑스 공방전
날짜1940년 5월 10일 ~ 1940년 5월 17일
장소네덜란드
결과독일의 승리
결과 상세독일의 네덜란드 점령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창설
유럽 전구 내 네덜란드 주둔군 제거
네덜란드 정부의 영국 망명
교전 세력
교전국 1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교전국 2나치 독일
지휘관
교전국 1 지휘관헨리 빙켈만
고드프리트 반 부르스트 톳 부르스트
앙리 지로
교전국 2 지휘관페도어 폰 보크
한스 폰 스포크네크
병력 규모
교전국 1 병력280,000명 (9개 사단)
교전국 2 병력750,000명 (22개 사단)
장비
교전국 1 장비총기 700문
전차 1대
준전차 5대
장갑차 32대
항공기 145기
교전국 2 장비총기 1,378문
전차 759대
항공기 830기
장갑열차 6대
피해 규모
교전국 1 사상자네덜란드: 2,332명 사망, 7,000명 부상
프랑스: 216명 사망
영국: 43명 사망
교전국 2 사상자2,032명 사망
6,000명 ~ 7,000명 부상
장갑열차 4대 파괴
항공기 225대 ~ 275대 파괴
1,350명 포로 (영국으로 압송)
민간인 사상자2,000명 이상 사망
전역 정보
전역 상자프랑스 공방전
서부 전선

2. 배경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제1차 세계 대전 당시와 같이 중립을 선언했다.[18] 이는 과거 중립 정책을 통해 전쟁의 참화를 피했던 경험과 주요 교역 상대국인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한 경제적, 정치적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12][13] 당시 네덜란드 정부와 사회는 독일의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대공황의 여파 속에서 국방력 강화보다는 긴축 재정을 우선시했다.[14][15]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1939년 10월, 저지대 국가 침공 계획(작전명 '팔 겔프') 수립을 지시했다. 독일은 네덜란드를 포함한 저지대 국가들의 전략적 가치를 높게 평가하여, 이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영국 공격을 위한 전진 기지를 확보하고, 연합군이 독일의 핵심 공업 지대인 루르 지방을 위협할 가능성을 차단하고자 했다.[9]

네덜란드는 이러한 독일의 침공 가능성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히틀러 집권 이후에도 네덜란드의 재무장은 주변국인 프랑스나 벨기에에 비해 더디게 진행되었고,[11] 국방 예산은 증액되었으나[19] 상당 부분이 본토 방위보다는 식민지인 네덜란드령 동인도 방어에 투입되었다.[21] 또한, 독일로부터 주문한 군사 장비는 의도적으로 납품이 지연되는 등[20] 실질적인 전력 증강에 어려움을 겪었다.

1939년 가을부터 1940년 봄까지 서부 전선은 가짜 전쟁이라 불리는 소강상태가 이어졌지만, 국제적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연합국 지도자들은 네덜란드에 연합국 측으로 참전할 것을 촉구했으나,[22] 네덜란드는 메헬렌 사건과 같이 독일의 침공 계획이 일부 노출되는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 유지를 고수했다.[23]

1940년 4월,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면서 네덜란드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27] 네덜란드 정부는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31] 군의 경계 태세를 강화했으며, 사회적으로는 독일 제5열의 활동에 대한 불안감이 커졌다.[29]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네덜란드 국민들은 여전히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32][33] 정부는 마지막까지 연합국의 참전 요구를 거부하며 중립 정책을 유지하려 했다.[34]

2. 1. 서막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서유럽 전선에서는 1939년 가을부터 1940년 봄까지 이렇다 할 교전 없이 가짜 전쟁이라 불리는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전을 대비하며 군사력을 증강했고, 독일은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다.[8] 1939년 10월 9일, 아돌프 히틀러는 저지대 국가 침공 계획(작전명 '팔 겔프') 수립을 명령했다. 이는 해당 지역을 영국 공격을 위한 전진 기지로 활용하고, 연합군이 독일의 핵심 공업 지대인 루르 지방을 위협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목적이었다.[9] 11월 7일,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공동으로 제안한 평화 중재안은 양측 모두에게 거부되었다.[10]

1939년 11월, 동원령으로 경계 근무 중인 네덜란드 군인


네덜란드는 이러한 독일의 침공 가능성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에도 네덜란드의 재무장은 프랑스나 벨기에보다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국방 예산은 1936년에 이르러서야 점진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11] 역대 네덜란드 정부는 독일을 군사적 위협으로 공개적으로 규정하는 것을 꺼렸다. 이는 주요 교역 상대국인 독일과의 관계 악화를 피하려는 경제적 고려[12]와 나치 정권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려는 정치적 분위기[13] 때문이었다. 또한, 대공황의 여파로 네덜란드 사회가 큰 타격을 입은 상황에서, 보수적인 정부는 긴축 재정 정책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었다.[14]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수상을 역임한 헨드리퀴스 콜레인은 개인적으로 독일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등, 위협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15] 군 고위 장교들 역시 국방력 강화의 필요성을 국민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지 않았다.[16]

1939년 알바니아 위기 당시, 네이메헌 발 강 다리를 지키는 네덜란드 군인


1930년대 후반, 국제적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 1936년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 1938년 안슐루스와 주데텐란트 위기, 1939년 봄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병합과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등 일련의 사건들은 네덜란드 정부의 경각심을 높였으나, 여전히 신중한 태도를 유지했다. 가장 구체적인 조치는 1939년 4월, 약 10만 명 규모의 부분 동원령이었다.[17]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지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8월 24일부터 군대를 동원했으며,[18] 국방력 강화에 약 9억 길더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19] 하지만 전쟁 발발 이후 새로운 군사 장비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특히 네덜란드는 필요한 장비 일부를 독일에 주문했는데, 독일은 의도적으로 납품을 지연시켰다.[20] 게다가 투입된 예산의 상당 부분은 본토 방위보다는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 방어, 그중 상당 부분은 3척의 순양전함 건조 계획(디자인 1047 순양전함 계획)에 할당되었다.[21]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위치한 저지대 국가들의 전략적 중요성은 명백했다. 프랑스의 마지노선이 끝나는 북쪽 측면에 위치하여, 양측 모두에게 상대방을 공격하기 위한 유력한 침공로로 여겨졌다. 1940년 1월 20일, 윈스턴 처칠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독일의 침공을 수동적으로 기다리지 말고 연합국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22] 그러나 1940년 1월, 독일 공군기의 벨기에 불시착으로 독일의 침공 계획 일부가 벨기에군에게 넘어간 메헬렌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여전히 중립을 고수하며 참전 요구를 거부했다.[23]

프랑스 최고 사령부는 1941년 여름으로 계획된 대규모 연합군 공세 이전에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연합국에 합류하지 않을 경우, 이들 국가의 중립을 침해하는 방안까지 고려했으나, 프랑스 내각은 부정적인 여론을 우려하여 이를 기각했다. 한편 독일은 네덜란드를 단독으로 침공하는 계획 외에도, 벨기에 침공을 위해 네덜란드 영토 통과를 요구하거나, 네덜란드가 연합군의 벨기에 진격을 허용할 경우 네덜란드를 공격하는 시나리오 등을 검토했다.[24] 네덜란드 정부는 이러한 가상 상황에 대한 공식적인 대응 방침을 정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각료는 침략에 저항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소수 각료와 빌헬미나 여왕은 어떤 상황에서도 독일의 동맹국이 되지는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25] 네덜란드는 여러 차례 연합국과 독일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 시도하기도 했다.[26]

1940년 4월,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네덜란드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새로 부임한 일본 해군 무관 타다시 마에다가 독일의 침공 가능성을 경고하기도 했다.[27] 더 이상 분쟁을 피할 수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네덜란드는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전쟁 대비 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국경 부대의 경계 태세가 강화되었고,[28] 스칸디나비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제5열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네덜란드 내부에도 독일 첩자나 반역자들이 암약하고 있다는 공포가 퍼졌다.[29] 비행장과 항만 시설에 대한 기습 공격 가능성에 대비한 조치들이 마련되었으며,[30] 4월 19일에는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31] 그러나 대다수 네덜란드 국민은 여전히 자국이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고, 임박한 위협을 애써 외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32][33] 네덜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협상국과 동맹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던 경험을 반복하기를 원했고, 강대국들의 분쟁에 휘말려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는 것을 두려워했다. 4월 10일,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한번 네덜란드에 연합국 측으로 참전할 것을 요청했지만, 네덜란드는 이를 거절했다.[34]

2. 2. 네덜란드의 중립 정책과 국제 정세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1939년부터 1940년 겨울까지 가짜 전쟁이라 불리는 기간 동안 서유럽에서는 대규모 지상전이 벌어지지 않았다.[8] 이 시기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전을 대비해 군사력을 증강했고, 독일은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다. 1939년 10월 9일, 아돌프 히틀러저지대 국가 침공 계획을 지시했다. 이는 영국을 공격할 기지로 활용하고, 연합군이 독일의 핵심 산업 지역인 루르 지방을 위협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었다.[9] 11월 7일,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공동으로 제안한 평화 중재안은 거부되었다.[10]

네덜란드는 이러한 침공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다. 히틀러 집권 이후 네덜란드의 재무장은 프랑스나 벨기에보다 더디게 진행되었으며, 국방 예산은 1936년에 이르러서야 점진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11] 네덜란드 정부는 주요 교역 상대국인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경제적 이유 등으로[12] 독일을 군사적 위협으로 공식 규정하는 것을 꺼렸으며, 이는 나치 정책에 대한 비판을 억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13] 또한 대공황의 타격을 심하게 받은 네덜란드 사회는 보수적인 정부의 엄격한 긴축 재정 정책 아래 놓여 있었고, 이는 국방력 강화에 제약이 되었다.[14]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총리를 지낸 헨드리퀴스 콜레인은 개인적으로 독일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침범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다.[15] 군 고위층 역시 국방력 증강을 위한 여론 형성에 소극적이었다.[16]

1930년대 후반 국제 정세는 급격히 악화되었다. 1936년 독일의 라인란트 재무장, 1938년 안슐루스와 주데텐란트 위기, 1939년 봄 독일의 보헤미아 및 모라바 점령과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등 위기가 연이어 발생했다. 이러한 사건들로 네덜란드 정부는 경계심을 높였으나, 대응은 신중했다. 가장 구체적인 조치는 1939년 4월 약 10만 명 규모의 부분 동원령이었다.[17]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25년 전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중립을 지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8월 24일부터 군대를 동원했으며,[18] 국방비로 약 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투입했다.[19] 그러나 전쟁 발발 이후 새로운 군 장비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는데, 특히 일부 장비는 독일에서 주문했기 때문에 독일 측이 의도적으로 인도를 지연시키기도 했다.[20] 또한, 예산의 상당 부분은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 방위를 위한 것이었고, 특히 3척의 순양전함 건조 계획과 관련이 있었다.[21]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위치한 저지대 국가들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이 지역은 양측 모두에게 매력적인 침공 경로로 여겨졌다. 1940년 1월 20일, 윈스턴 처칠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독일의 공격을 기다리지 말고 연합국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22] 같은 해 1월, 독일 군용기가 벨기에에 추락하여 독일의 침공 계획 일부가 벨기에군에게 넘어간 메헬렌 사건이 발생했음에도,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중립 유지를 고수하며 처칠의 제안을 거절했다.[23]

프랑스 최고사령부는 1941년 여름으로 계획된 대규모 연합군 공세 이전에 저지대 국가들이 연합국에 가담하지 않을 경우, 이들의 중립을 침해하는 방안을 검토하기도 했으나 프랑스 내각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반면 독일은 네덜란드 단독 침공을 계획하고 있었다.[24] 네덜란드 정부는 자국 영토가 침범당했을 경우의 대응책을 명확히 수립하지는 못했다. 각료 대부분은 저항을 주장했지만, 소수 의견과 빌헬미나 여왕은 어떤 상황에서도 독일과 동맹을 맺는 것을 거부했다.[25] 네덜란드는 여러 차례 연합국과 독일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 시도하기도 했다.[26]

독일의 노르웨이와 덴마크 침공 이후, 네덜란드 주재 신임 일본 해군 무관 타다시 마에다가 독일의 네덜란드 공격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면서,[27] 네덜란드가 분쟁에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네덜란드는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전쟁 대비 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국경 부대의 경계 수준이 높아졌고,[28] 스칸디나비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제5열에 대한 우려로 네덜란드 내에서도 독일 요원과 부역자들이 활동할 수 있다는 공포가 확산되었다.[29] 비행장과 항만 시설에 대한 기습 공격 가능성에 대비한 조치들이 마련되었으며,[30] 4월 19일에는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31] 그러나 많은 네덜란드 국민들은 여전히 자국이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을 보였다.[32][33] 네덜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협상국과 동맹국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던 정책이 반복되기를 바랐고, 강대국들의 분쟁에 휘말려 막대한 인명 피해를 겪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4월 10일, 영국과 프랑스가 다시 한번 연합국 측으로 참전할 것을 요청했지만, 네덜란드는 이를 거절했다.[34]

2. 3. 독일의 침공 계획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했지만, 1939년부터 1940년 겨울까지 서유럽에서는 가짜 전쟁이라 불리는 소강상태가 이어지며 별다른 지상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영국과 프랑스는 장기전을 대비해 군사력을 증강했고, 독일은 소련과 함께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다.[8] 1939년 10월 9일, 아돌프 히틀러는 저지대 국가 침공 계획을 명령했다. 이는 저지대 국가를 점령하여 영국에 대한 공격 기지로 활용하고, 동시에 연합군이 독일의 핵심 공업 지대인 루르 지방을 위협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전략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9] 11월 7일,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공동으로 제안한 평화 중재안은 양측 모두에게 거부되었다.[10]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위치한 저지대 국가들의 전략적 위치는 중요했다. 특히 프랑스의 마지노선이 미치지 않는 북쪽 측면에 위치했기 때문에, 양측 모두에게 매력적인 침공 경로로 여겨졌다. 1940년 1월 20일, 윈스턴 처칠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독일의 공격을 기다리지 말고 영불 연합에 합류할 것을 촉구했다.[22] 그러나 1940년 1월, 메헬렌 사건으로 독일 항공기가 추락하여 독일의 침공 계획 일부가 벨기에군에게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중립 유지를 고수하며 이를 거부했다.[23]

독일은 네덜란드를 단독으로 침공할 계획을 세우면서, 두 가지 시나리오를 고려했다. 하나는 벨기에를 통해 연합군을 공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가 독일군의 벨기에 진격을 위해 자국 영토 남부를 통과하도록 허용하는 경우였다.[24] 네덜란드 정부는 이러한 만일의 사태에 대한 공식적인 대응 방침을 정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장관들은 독일에 저항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소수 의견과 빌헬미나 여왕은 어떤 상황에서도 독일의 동맹국이 되기를 거부했다.[25] 네덜란드는 여러 차례 연합국과 독일 사이의 평화 협상을 중재하려 시도하기도 했다.[26]

그러나 네덜란드는 이러한 독일의 침공 위협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에도 네덜란드의 재무장은 프랑스나 벨기에보다 더뎠으며, 국방 예산은 1936년에 이르러서야 점진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11] 당시 네덜란드 정부는 주요 교역 상대국인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경제적 이유와[12] 나치 정책에 대한 비판을 억제하려는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13] 독일을 심각한 군사적 위협으로 규정하는 것을 꺼렸다. 또한,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엄격한 긴축 재정 정책도 국방력 강화에 제약이 되었다.[14] 1933년부터 1939년까지 총리였던 헨드리퀴스 콜레인은 개인적으로 독일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침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며,[15] 군 고위 장교들 역시 국방력 증강을 위한 여론 형성에 소극적이었다.[16]

1930년대 후반, 국제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네덜란드 정부도 경각심을 높이기는 했다. 1936년 독일의 라인란트 점령, 1938년 안슐루스와 주데텐란트 위기, 1939년 봄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과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침공 같은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하자, 네덜란드 정부는 1939년 4월 10만 명 규모의 부분 동원령을 내리는 등[17] 조치를 취했지만, 여전히 반응은 제한적이었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중립을 지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8월 24일부터 군대를 동원하고[18] 약 에 달하는 막대한 예산을 국방에 투입했다.[19] 하지만 전쟁 발발 이후 새로운 군사 장비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으며, 특히 일부 장비를 주문했던 독일이 의도적으로 납품을 지연시키기도 했다.[20] 게다가 투입된 예산의 상당 부분은 본토 방위보다는 네덜란드령 동인도(현재의 인도네시아) 방어, 특히 3척의 디자인 1047 순양전함 계획에 할당되어 있었다.[21]

독일의 노르웨이와 덴마크 침공 이후, 새로 부임한 일본 해군 무관 타다시 마에다가 네덜란드에 대한 독일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경고하면서[27] 네덜란드 내에서도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네덜란드군은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전쟁 대비 태세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국경 부대의 경계 수준도 높아졌다.[28] 스칸디나비아에서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제5열에 대한 보고는 네덜란드 내에서도 독일 스파이나 반역자에 대한 광범위한 공포를 확산시켰다.[29] 이에 따라 비행장과 항만에 대한 기습 공격 가능성에 대비한 조치들이 마련되었고,[30] 1940년 4월 19일에는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31]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네덜란드 민간인들은 여전히 자국이 전쟁의 참화를 피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으며,[32] 현실을 외면하는 경향을 보였다.[33] 네덜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협상국과 동맹국 사이에서 중립을 지켰던 경험을 반복하기를 원했고, 강대국들의 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4월 10일, 영국과 프랑스는 다시 한번 네덜란드에 연합국 측으로 참전할 것을 요청했지만, 네덜란드는 이를 거절했다.[34]

3. 네덜란드군

네덜란드는 방어에 유리한 지형과 잠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방력 강화에 소홀했던 결과 독일 국방군의 침공 당시 전쟁 준비가 매우 미흡한 상태였다.[35] 이는 오랜 기간 지속된 국방 예산 삭감과 국제 정세에 대한 안일한 인식 때문이었다.[14][38]

네덜란드 왕립육군은 현대적인 기갑전투차량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으며,[44] 보유한 장갑차준전차는 소수에 불과했다. 포병 전력 역시 대부분 구식 야포와 곡사포로 구성되었고,[49] 대전차포 수량은 턱없이 부족했다.[50] 보병들은 구식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기관총과 박격포 등 지원 화기도 부족하여 전반적인 화력이 매우 약했다.[53][54] 방어 전략은 전국에 분산된 사격 진지에 크게 의존했으나,[42] 현대적인 대규모 요새는 거의 없었다.

육군 소속이었던 네덜란드 왕립공군은 규모가 작았을 뿐만 아니라,[44] 보유 항공기의 상당수가 복엽기를 포함한 구식 기종으로 이루어져 있었다.[56] 포커와 같은 자국 항공기 산업의 잠재력에도 불구하고 예산 부족으로 현대적인 공군력 건설은 이루어지지 못했다.[58]

네덜란드군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장비 부족과 더불어 심각한 훈련 부족이었다.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고 운용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으며,[59] 병사들의 복무 기간이 짧아 숙련도가 낮았고 전문 군 인력도 부족했다.[60][61] 1939년 8월 총동원령이 내려진 이후에도 병력 대부분이 방어 시설 구축에 투입되면서 실질적인 전투 훈련은 부족했고 군의 준비 상태는 더디게 개선되었다.[63][64] 결국 네덜란드군은 현대적인 기동전을 수행할 능력이 거의 없는 상태로 독일의 침공을 맞이했으며,[66] 이는 독일군 지휘부가 네덜란드 점령을 단기간 내에 완료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67]

3. 1. 네덜란드 왕립육군

네덜란드의 주요 방어선


네덜란드는 인구 밀도가 높고, 부유하며, 젊고 규율 있는 인적 자원과 방어에 유리한 지형, 군수 산업을 포함한 강력한 기술 및 산업 기반 등 성공적인 방어를 위한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잠재력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 당시 독일 국방군 역시 장비와 훈련 면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네덜란드 육군은 그에 비해 전쟁 준비가 훨씬 미흡한 상태였다.[35] 프랑스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연합군보다 장비 면에서 우수했다는 통념과 달리, 네덜란드 전역에서는 실제로 독일군의 장비 우위가 두드러졌다. 독일은 전차융커스 Ju 87 슈투카 급강하폭격기 등을 갖춘 현대적인 군대였던 반면, 네덜란드 육군은 기갑 부대가 장갑차 39대와 준전차 5대에 불과했고, 공군 역시 복엽기가 상당수를 차지하는 등 시대에 뒤떨어진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네덜란드 군대의 실정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국방력 강화에 소홀했던 정부의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었다.[36][37] 1920년대에는 경기 침체와 국제적인 긴장 완화 분위기 속에서 국방 예산이 크게 삭감되었고,[14] 장비 구매 예산은 연간 150만 길더에 불과했다.[38] 1931년과 1933년의 예산 절감 위원회는 오히려 국방력 강화의 시급성을 지적했지만,[39] 실질적인 예산 증액은 1936년 2월에야 5,340만 길더 규모의 특별 방위 자금이 통과되면서 이루어졌다.[11]

부족한 훈련 기반, 전문 인력 부족, 물자 부족은 네덜란드군의 신속한 확장을 가로막았다.[40] 네덜란드 육군은 8개 보병사단(4개 군단 소속), 1개 경사단(차량화 부대), 그리고 각각 반 사단 규모인 5개 대대로 구성된 독립 여단 2개(A, B 여단)로 구성되었다. 이 외의 보병 부대는 적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전국에 분산 배치된 경보병 대대들이었다.[41] 약 2,000개의 사격 진지가 구축되었지만,[42] 깊이 있는 방어선을 형성하지는 못했다. 벨기에의 에반에마엘 요새와 같은 현대적인 대규모 요새는 없었으며, 유일한 현대식 요새 단지는 아프슬라위트데이크를 방어하는 콘워더잔드에 있었다. 네덜란드군은 총 48개 보병 연대와 22개 독립 보병 대대를 국경 방어에 투입했는데, 이는 인구가 더 적었던 벨기에가 22개 정규 사단과 30개 예비 사단을 동원한 것과 비교하면 부족한 규모였다.

1939년 9월 이후 상황 개선을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독일은 의도적으로 무기 인도를 지연시켰고, 프랑스는 네덜란드 군비 증강에 소극적이었다. 당시 쉽게 무기를 구할 수 있었던 소련과는 외교 관계가 수립되지 않아 접근할 수 없었다. 겨울 전쟁 당시 핀란드가 노획한 소련제 기갑 장비를 구매하려는 시도도 실패로 돌아갔다.[43]

1940년 5월 10일 침공 당시, 네덜란드 육군의 가장 큰 약점은 기갑 장비의 절대적인 부족이었다.[44] 다른 주요 참전국들이 상당한 규모의 기갑 부대를 운용한 것과 달리, 네덜란드는 1937년에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최소 146대의 현대식 전차(경전차 110대, 중전차 36대)조차 확보하지 못했다.[45] 유일하게 보유했던 르노 FT-17 전차 1대는 훈련 및 장애물 테스트용으로만 사용되다가 1940년에는 더 이상 운용되지 않았다.[46] 실질적인 기갑 전력은 란즈베르크 M36 또는 M38 장갑차 24대(2개 중대)와[47] 인도 중이던 M39 판처바헨 장갑차 12대(일부는 주포 미장착 상태)가 전부였다.[48] 여기에 포병대가 운용한 카든 로이드 마크 6 준전차 5대로 구성된 1개 소대가 네덜란드 기갑 장비의 전부였다.

네덜란드 포병대는 총 676문의 곡사포야포를 보유했다. 세부적으로는 부분적으로 허가 생산된 크루프 75mm 야포 310문, 유일한 현대식 포였던 보포스 105mm 곡사포 52문, 구식[49] 크루프 125mm 대포 144문, 150mm FH13 곡사포 40문, 크루프 150mm L/24 곡사포 72문, 비커스 152mm L/15 곡사포 28문이 있었다. 대전차포는 뵐러 47mm L/39 386문을 보유했지만 수가 너무 적었고 이는 계획된 수량의 3분의 1에 불과했으며,[50] 구형[51] 6벨트(57mm) 및 8스타알(84mm) 야포 300여 문이 대전차 임무를 보조했다. 독일에서 주문한 현대식 105mm 야포 120문 중에서는 단 8문만이 침공 전에 인도되었다. 대부분의 포는 말이 끄는 방식이었다.[52]

네덜란드 보병은 약 2,200정의 7.92mm 슈바르츠로제 M.08 기관총과 800정의 비커스 기관총을 운용했다. 이들 중기관총 대부분은 고정된 사격 진지에 배치되었으며, 각 대대는 12정의 중기관총을 보유한 중대를 두었다. 분대 지원 화기로는 M.20 루이스 경기관총 약 8,000정이 지급되었다. 대부분의 보병들은 1895년에 채택된 구식 게베르 M.95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각 연대는 80mm 박격포를 6문밖에 보유하지 못하는 등,[53] 전반적인 화력 부족은 네덜란드 보병의 전투력을 심각하게 제한했다.[54]

네덜란드의 이동식 대공포. 이 대공 트럭은 1918년 말 패전한 독일군에게서 연합군이 노획한 물자를 네덜란드군이 구매한 독일제 차량이었다.


유럽 최대의 무선 장비 생산 업체 중 하나인 필립스 본사가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 군대는 통신을 대부분 유선 전화에 의존했다. 포병대만이 225개의 무선 통신 장비를 갖추고 있었을 뿐이다.[52]

3. 2. 네덜란드 왕립공군

네덜란드 공군은 네덜란드군의 독립된 조직이 아니라 육군의 일부였다.[44] 1940년 5월 10일 기준으로 네덜란드 공군은 총 155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이 중 125대가 실제 운용 가능한 상태였다.[56] 보유 항공기 중 74대는 복엽기였다.

보유 항공기의 세부 내역은 다음과 같다.

기종유형수량
포커 G.I쌍발 전투기28대
포커 D.XXI전투기31대
포커 D.XVII전투기7대
포커 T.V쌍발 폭격기10대
포커 C.X경폭격기15대
포커 C.V경폭격기35대
더글러스 DB-8[55]급강하 폭격기 (전투기로 운용)12대
쿨호벤 F.K.51정찰기17대



이 외에도 공군학교에서 훈련용 항공기와 함께 포커 D.XXI 3대, 포커 D.XVII 6대, 포커 G.I 1대, 포커 T.V 1대, 포커 C.V 7대를 운용했다. 또한 해군 항공 서비스(Marineluchtvaartdienst)는 약 40대의 작전 항공기와 비슷한 수의 예비 및 훈련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었다.[57]

네덜란드의 군용기 산업은 포커와 쿨호벤으로 대표되었으나, 예산의 제약으로 인해 생산 잠재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58]

3. 3. 훈련 및 준비 상태

네덜란드 육군은 장비가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훈련 상태도 매우 미흡했다. 특히 대대급 이상의 대규모 부대를 지휘하고 운용해 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1932년부터 1936년까지 네덜란드 육군은 예산을 아끼기 위해 여름철 군사 훈련을 실시하지 않았다.[59] 개별 병사들 역시 전투에 필요한 여러 기술이 부족한 상태였다. 전쟁 발발 전까지는 군 복무 대상자 중 일부 소수만이 실제로 징집되었다. 1938년 이전까지 징집병들은 단 24주 동안만 복무하며 기본적인 보병 훈련만 받는 수준이었다.[60] 1938년에 이르러서야 복무 기간이 11개월로 늘어났다.[11] 이러한 징집병의 낮은 숙련도는 충분한 수의 전문 군인으로 보완되지도 못했다. 1940년 당시 네덜란드 육군의 전문 장교는 1,206명에 불과했다.[61]

전쟁의 위협이 고조되자 이러한 문제점들이 빠르게 개선되기를 기대했지만, 1939년 8월 28일 네덜란드군 전체에 동원령이 내려져 약 28만 명의 병력이 소집된 이후에도[62] 군의 준비 상태는 더디게 개선되었다. 동원된 병력 대부분의 시간이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데 투입되었기 때문이다.[63] 이 기간 동안 군수품 부족으로 실탄 사격 훈련이 제한되었고,[64] 부대원 간의 단결력과 조직력도 여전히 낮은 수준에 머물렀다.[65] 결국 1940년 5월, 네덜란드 육군은 스스로의 기준에 비추어 보아도 전투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현대적인 기동전을 수행할 능력이 부족했으며, 사단 단위의 공세 작전조차 실행하기 어려웠다.[66]

독일군 지휘부와 전술가들, 그리고 히틀러 역시 네덜란드군의 전투력을 낮게 평가했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핵심 지역을 점령하는 데 약 3일에서 5일 정도면 충분할 것으로 예상했다.[67]

4. 네덜란드의 방어 전략

네덜란드 워터 라인의 전방 방어선인 그레베 선은 진한 파란색으로 표시된다.


네덜란드는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 시절부터 자국의 저지대 지리적 특성을 활용한 독특한 방어 전략을 사용했다.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당시 처음 고안된 네덜란드 워터 라인은 특정 지역을 의도적으로 침수시켜 적의 진격을 저지하는 시스템으로,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보호하는 데 효과를 보았다.

19세기 초, 이 방어선은 위트레흐트 동쪽으로 이동 및 확장되었고, 요새 시설을 통해 현대화되어 뉴 네덜란드 워터 라인으로 발전했다. 이 라인은 해수면보다 낮은 지형을 이용하여, 침수 시 배가 다니기에는 너무 얕지만 군대가 통과하기는 어려운 수렁을 만들어 방어하는 원리였다. 1940년에는 구식 요새에 새로운 사격 진지를 추가하여 보강되었다.

뉴 네덜란드 워터 라인의 서쪽 지역은 '''네덜란드 요새'''(Vesting Hollandnl, Festung Hollandde)라고 불렸으며, 동쪽은 에이설호, 남쪽은 뫼즈강과 라인강 하류로 자연적인 보호를 받았다. 네덜란드는 이 요새가 국가 보루 역할을 하여, 연합군의 도움 없이도 최대 3개월간[69] 버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70] 그러나 이는 침공해 올 독일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상당히 과대평가한 예측에 기반한 것이었다.[68]

4. 1. 네덜란드 워터 라인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은 네덜란드 워터 라인이라는 독특한 방어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 시스템은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기간 동안 농촌 지역 일부에 물을 채워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효과적으로 보호하는 데 사용되었다. 19세기 초, 이 방어선은 위트레흐트 동쪽으로 약간 이동되었고, 이후 요새 시설을 통해 현대화 작업을 거쳤다. 이 새로운 방어선은 뉴 네덜란드 워터 라인이라고 불렸다. 1940년에는 기존의 다소 구식화된 요새에 새로운 사격 진지를 추가하여 보강했다.

방어선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구축되었다. 이 지리적 특징을 이용하여, 방어선 앞 지역에 물을 채워 배가 다니기에는 너무 얕지만, 사람이 걸어서 통과하기는 어려운 깊이의 수렁으로 만들 수 있었다. 뉴 네덜란드 워터 라인의 서쪽 지역은 '''네덜란드 요새'''(Vesting Hollandnl, Festung Hollandde)라고 불렸다. 이 요새의 동쪽과 남쪽은 각각 에이설호와 세 개의 넓은 강(뫼즈강 및 라인강의 두 하류 줄기)으로 자연적인 보호를 받았다. 네덜란드 측은 침공하는 독일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강하게 과대평가했음에도 불구하고,[68] 이 요새가 연합군의 도움 없이도 최대 3개월 동안[69] 버틸 수 있는 국가 보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70]

4. 2. 네덜란드 요새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은 네덜란드 방어선(Dutch Water Line)이라 불리는 독특한 방어 체계를 고안했다. 이는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당시 서부 주요 도시들을 보호하기 위해 시골 지역 일부를 의도적으로 침수시키는 방식이었다. 19세기 초, 이 방어선은 위트레흐트 동쪽으로 약간 이동하며 현대적인 요새로 강화되었고, 이를 '뉴 네덜란드 워터 라인'이라 부른다. 1940년에는 오래된 요새들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사격 진지들이 추가되었다.

이 방어선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의 동쪽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따라서 방어선 앞의 땅은 침수시키면 보트가 다니기에는 너무 얕지만, 걸어서 통과하기 어려운 깊은 수렁으로 변해 적의 진격을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 뉴 네덜란드 워터 라인의 서쪽 지역을 '''네덜란드 요새'''(Vesting Hollandnld, Festung Hollanddeu)라고 불렀다. 이 요새 지역은 동쪽과 남쪽이 각각 에이설호와 세 개의 넓은 강(뫼즈강과 라인강의 두 하류 줄기)으로 자연적인 보호를 받고 있었다.

네덜란드 요새는 국가 최후의 보루 역할을 하도록 계획되었다. 비록 공격하는 독일군의 규모를 실제보다 훨씬 크게 예상하기는 했지만,[68] 가장 낙관적인 예측에 따르면 연합군의 도움 없이도 최대 3개월까지[69] 버틸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70]

4. 3. 방어 전략의 한계



17세기 네덜란드 공화국은 '네덜란드 워터 라인'이라는 독특한 방어 체계를 개발했다. 이 시스템은 프랑스-네덜란드 전쟁 당시 농촌 지역 일부를 의도적으로 침수시켜 서부의 주요 도시들을 보호하는 데 사용되었다. 19세기 초, 이 방어선은 위트레흐트 동쪽으로 약간 이동하며 '뉴 네덜란드 워터 라인'이라 불리게 되었고, 이후 요새 시설로 현대화되었다. 1940년에는 오래된 요새들을 보완하기 위해 새로운 사격 진지들이 추가되었다.

워터 라인은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의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했다. 이 지리적 특성을 이용하여 해당 지역을 쉽게 침수시킬 수 있었는데, 물의 깊이는 배가 다니기에는 너무 얕지만, 군대가 통과하기는 어려운 수렁으로 만들도록 조절되었다. 뉴 네덜란드 워터 라인의 서쪽 지역은 '네덜란드 요새'(Vesting Hollandnl, Festung Hollandde)로 불렸다. 이곳은 동쪽과 남쪽이 각각 에이설호와 세 개의 넓은 강 하류(뫼즈강과 라인강의 두 지류)로 자연적인 보호를 받고 있었다.

이 방어선은 일종의 '국가 보루'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가장 낙관적인 예측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연합군의 도움 없이도 최대 3개월간 버틸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69][70]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실제 공격해 올 독일군의 규모를 상당히 과대평가한 것에 기반하고 있었다.[68] 또한, 1940년 시점에는 요새 시설 자체가 다소 구식화되어 있었다는 점도 한계로 지적될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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